“명의신탁 재산은 반환 청구할수 없다”…에 ‘반기’
<2006-06-15 >    

[한겨레] 일선 판사가 대법 판례에 ‘반기’

의류회사를 경영하던 박아무개씨는 1998년 외환위기로 사업이 어려워지자, 채권자한테 집이 넘어가지 않도록 집을 외삼촌 이름으로 등기했다. 박씨는 자신이 갚아야 할 채권의 소멸시효가 끝나자 이 집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외삼촌이 이를 거부하자 소유권이전등기 청구 소송을 냈다. 박씨는 자기 집을 되찾을 수 있을까?

부동산실명제법은 박씨와 같은 ‘명의신탁’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지만, 대법원은 부동산실명제법과는 상관없이 명의신탁자의 원 소유권을 인정해왔다. “부동산실명제법이 투기·탈세·탈법행위 등 반사회적 행위를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됐다고 하나, 명의신탁 약정은 그 자체로서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불법원인급여(도박자금 등 불법적으로 제공된 재산)로 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서울서부지법 민사2단독 이종광 판사는 15일 대법원 판례와 달리 “명의신탁으로 인한 재산은 ‘불법원인급여’이므로 이의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며 박씨의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이 판사는 판결문에서 “단순히 부동산실명제법 위반자가 형사처벌이나 행정적 제재를 받게 되면 그만이지 명의신탁자가 그 소유권을 회복하는 것은 부동산실명제법과 별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는 대법원의 태도는, 부동산실명제의 입법취지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명의신탁이 탈세나 강제집행 면탈 등에 악용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대법원이 부동산실명제가 시행된 지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이전의 견해를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부동산실명제의 제도적 정착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면이 없는지 살펴봐야 할 때”라고 밝혔다.

부동산 명의신탁의 부당성을 지적한 판결은 이보다 앞선 2003년에도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재판장 조희대)는 “명의신탁자에게 민사상의 구제를 허용하게 되면 투명한 부동산 거래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부동산실명제의 근간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명의신탁자의 원래 소유권을 부정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돼, 아직 대법원 판례에는 변화가 없는 상태다.

따라서 이번 판결이 새로운 대법원 판례로 확정되면 부동산 명의신탁 행위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강제집행면탈 등 명의신탁을 이용한 범죄행위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또한 투기꾼들의 지능적인 탈세를 막을 수 있어 부동산 시장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 판사도 “수천억원의 형사 추징금을 선고받았던 전직 대통령이 ‘29만원밖에 없어 추징금을 내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 자식들은 수백억원대의 부동산을 가지고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법현실”이라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투기를 통해 부를 축적한 뒤 세금을 포탈하고, 그렇게 얻은 돈으로 다시 투기를 하는 상황은 이제 끝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