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04-12-28 21:19]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


여야 합의하에 국회 법사위 소위가 27일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현 민법개정안에 대해 합의하고 국회 본회의 통과 시기를 내년 2월로 늦추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한편 반가우면서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본회의 통과시기를 내년 2월로 늦춘 이유가 한나라당이 호적을 대신할 새 신분공시제도를 문제 삼았기 때문이라는데 새 신분공시제도를 맡아 처리할 대법원과 법무부는 이미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대안을 준비해 왔고, 1인1적(一人一籍)제와 가족부 두 가지 안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만 모으면 되는데 대법원과 여성계는 1인1적제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인1적제를 채택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가족관계를 다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지만 이미 선진국에서 실행한 선례를 참고할 때 이에 대해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올해 세계 전자정부 순위 제5위이고 민간 분야로는 전산화가 미국보다 더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전국 호적사무의 전산화 작업이 모두 완료된 우리 현실에서는 구미의 많은 나라가 택하고 있는 1인1적 제도를 채택하는 것이 긴 안목으로 볼 때 국가의 비용과 혼란을 줄일 수 있는 선택일 것이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혈통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며 조상 봉사자는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호주제 폐지로 그 같은 전통이 끊길지 모른다는 걱정은 우리 전통에 대한 오해에서 온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상 봉사는 딸 아들 구별 없이 공동 책임이었다. 그 관습을 되살리면 된다. 혈통 계승도 집집마다 만들어 간직하는 족보로 얼마든지 대치된다. 호주제를 폐지하는 것은 그 족보를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해방 후 1948년 민주헌법이 제정되고 그에 기초해서 하위법인 민법이 제정되던 당시부터 비민주적 제도로서 폐지 논란이 되어오면서도 폐지되지 않았던 것은 호주제도가 중국의 종법제와 일본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근간을 두고 있는 사상적 침략도구였기 때문이다. 무력침략.경제침략.사상침략 중 사상침략이 가장 무서운 침략이라는 데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력.경제침략을 당할 경우 가해자나 피해자가 모두 분명하게 침략을 인식한다. 그러나 사상침략의 경우에는 침략이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사상침략을 당한 피해자가 침략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소신이고 자신과 나라를 위하는 행위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사상침략이 가장 무섭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영원히 자기 속국화하기 위해서는 사상침략을 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상침략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의한 가족국가론을 기반으로 한 호주제도를 우리나라에 관제관습화를 통해 이식했다는 것은 사적 고찰을 통해 알 수 있다.


법은 사회를 일정한 방향으로 지향하도록 규율하는 기능을 가지고 사회구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방향은 법의 이념에 의해 결정된다. 법이란 또 어떠한 의미에서 현실 생활규범의 반사다. 따라서 현실의 생활규범과 관계없이 제정된 입법은 생활을 규율할 실현성이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호주제를 포함한 현행 민법은 50년 전 입법 당시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측면이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진 한국 사회를 규율하기가 어렵다. 17대 국회의원들은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일제 사상침략의 도구인 호주제도를 하루빨리 우리 민법에서 폐지하고 개인의 존엄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인 민법을 출현시켜주리라 믿는다. 인간이 최초로 속하는 사회인 가정에서부터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사회.국가의 민주화는 이뤄질 수 없다.